고양이 털을 모으는 마음으로
직업상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물건이 많지만, 최근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교수님이 2004년부터 만드셨다는 ‘테이프 공’이다. 포장을 해체할 때 나오는 접착테이프나 스티커 등을 돌돌 말아 공으로 만든 것인데, 처음에는 조그마한 테이프 뭉치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여러 개의 테이프 공을 설치작업으로 전시할 만큼 대규모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의지를 담아 꾸준히 실천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한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예로 털 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는 고양이의 털은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지만, 그 털을 매일매일 모아 단단히 뭉치면 귀여운 공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털 공이 커지는 맛에 재미를 붙이면, 어느새 고양이 털 빗어주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애묘인이 유독 많은 일본에서는 고양이 털을 모아 간단한 핸드메이드 소품을 만드는 실용서까지 나왔다. 이 책은 작년 9월 <고양이털로 펠트 만들기 1, 2>라는 이름의 한국어판도 나온 바 있다.
언니 스밀라의 털로 만든 공을 꼼꼼하게 검사하는 동생 하리.
연초에 테이프 공과 털 공을 이야기하는 건 ‘길고양이를 위한 사소한 실천’을 생각해보기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양이 사진 전시회나 한국고양이의 날 강연회에서 관객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면 여러 분들의 고민을 듣게 된다. 이제 막 길고양이의 현실에 눈뜬 분의 경우 “길고양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무엇부터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게 주된 고민이고, 이미 캣맘인 분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양이들이 점점 늘어나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고민이 많다.
전자의 경우엔 ‘내가 꾸준히 잘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시라고 권한다. 그 일이 고양이 털처럼 미미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일의 크기’보다 ‘일의 지속 가능성’이다.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도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면 포기하기 쉽고, 시작부터 일의 규모가 너무 커지면 꾸준히 이어가기 힘들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원과 재능은 다르기 때문이다.
캣맘을 신뢰하는 길고양이. 낯선 사람을 봐도 밥 달라며 고함을 친다.
내 경우엔 2002년부터 시작한 길고양이 사진 찍기가 시작이었다. 딱히 촬영 장비랄 것도 없어서 200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스냅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휴대전화에 내장된 디지털 카메라가 1천만 화소 안팎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사양이었다. 원본 보관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라 마음에 드는 사진은 블로그에 올리면서 리사이즈를 해버린 바람에, 초기 사진들은 하나같이 파일 크기가 작았다.
하지만 그 사소한 사진이 매일 모여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 블로그가 되었고, 고양이 책이 되었고, 사진전이 되었다. 길고양이의 현실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일을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고, 기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개인적인 고양이 취재도 병행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고양이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고양이가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될 책을 만들고 있다. 그 모든 게 길고양이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고양이 동네를 취재하며 다양한 분들을 만나는 동안, 길고양이에게 힘이 되어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았다. 길고양이 인식 개선 캠페인을 펼치는 동물운동가의 방식으로, 길고양이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캣맘의 방식으로, 길고양이 관련 콘텐츠를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는 디자이너의 방식으로, 무심코 스쳐 지나치는 고양이의 삶을 영원히 남기는 작가의 방식으로….
갓 주차된 트럭 밑에서 추위를 피해보려는 길고양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때, 길고양이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아마 이분들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길고양이를 위한 행동에 나섰다면, 그것만이 정답이라 믿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길고양이를 위한 시간이나 비용에 큰 할애를 하기 어렵거나, 콘텐츠를 직접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길고양이 이슈가 담긴 글의 리그램이나 리트윗에 동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좀 더 어려운 것은 후자의 경우, 즉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길고양이들이 점점 늘어나 감당이 되지 않을 때”다. 처음에는 집 근처 한 마리에게 밥 주는 일로 시작했지만,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히니 밥 주는 구역이 넓어지고 사료 양이 늘어난다. 사료 값까지야 부담할 수 있다 쳐도, 가끔 다치거나 아픈 고양이들이 생기면 병원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 거기에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웃과 갈등까지 생기면 마음은 피폐해진다. 고양이가 안쓰러워 시작한 일이지만, 그 일이 나를 너무 힘들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스트하우스의 식객 길고양이. 돌봐주는 손길이 많아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그런 분들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다. 경제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각자의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걸 넘어선 단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일 때 어디서든 무리가 생긴다. “그럼 불쌍한 애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외면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정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후유증은 나뿐 아니라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에게도 미치기 마련이다. 길고양이를 보듬는 마음으로, 그동안 가장 힘들었을 나를 보듬는 시간도 가져야만 다시 힘을 내어 거리로 나설 수 있다.
2019년의 첫 달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고양이 털 모으는 마음을 떠올린다. 흩날리는 털처럼 가볍고 미미해 보이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실천이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본다. 길고양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건, 내가 무엇을 잘하고 오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파악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새해에 어울리는 고민인 셈이다.
글‧사진 고경원
고양이 전문출판 ‘야옹서가’ 대표.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기록하며 국내외 애묘문화를 취재해왔다. 저서로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작업실의 고양이》(2011),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둘이면서 하나인》(2017) 등이 있다. www.instagram.com/catstory_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