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길고양이들 밥을 챙겨주러 집을 나섭니다.
차돌이와 로빈이 먹을 수 있도록 플라스틱 용기에 캔을 하나 따서 사료 위에 얹어 놓습니다.
잠시 기다리니 철책 뒤로부터 차돌이가 내려와서 입에 댑니다.
하지만 뒤에 뭐가 있는지 녀석은 급히 피하듯이 잠시 몇 걸음 물러났다가 철책 뒤를 경계하며 조심스레 다시 옵니다.
그리고는 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중단했던 쳐묵을 재개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한 것처럼 철책 뒤에 대한 경계를 감추지 못 합니다.
방향을 바꿔 사진을 찍느라 제가 이동하며 가까이 가도 녀석의 정신은 철책 뒤의 무엇엔가에 쏠려 있습니다.
이쯤에서 저도 대충 감을 잡습니다.
얼마 전부터 윗동네 사시는 캣맘 한 분이 그러시길 커다란 회색 고양이가 왔다갔다 하는 게 보이더랍니다.
저도 며칠 전에는 애들 밥 주다가 기척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가 대단해서 캄캄한 밤중에 녀석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고, 일반적으로 털 무늬로 구분되는
삼색이, 노랑둥이, 고등어, 턱시도 뭐 이런 애들하고는 많이 다르고, 굳이 분류하라면 카오스에 가깝지 않을까...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녀석이 왔구나 싶습니다.
숨을 죽이고 동작을 멈춘 채 조용히 기다립니다.
약간의 기척이 느껴지자 그 쯤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렌즈를 맞춘 후 셔터를 누릅니다. 이게 그... 회색 고양이...??!!
좀 더 숨을 죽인 후 녀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때다 싶을 때 한 방 더 찍습니다.
찍고 보니.... 오 마이 갓,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너구리입니다...!!
제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미동도 않으니 녀석은 인기척은 없다고 판단한 듯 바위 위로 몸을 드러냅니다.
연방 터지는 디카의 플래시는 그저 자연현상 정도로 인식하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실체를 완전히 드러낸 너구리... 길고양이 차돌이와 먹이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입니다.
너구리의 출현과 위협적인 움직임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듯, 차돌이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쭉 뻗고 등을 굽혀 자신의 본래 몸보다 크게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위협을 느꼈을 때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본능적인 동작입니다.
너구리도 차돌이의 동작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는 어쩔까 고민 중인 모습이 역력합니다.
연신 셔터를 누르며 지켜보는 제 손에도 땀이 맺힙니다. 과연 이 두 녀석이 한 판 붙게 될 것인가...
하지만 야생의 녀석들은 한 끼의 식사에 목숨을 걸 정도로 무모하진 않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올인하지는 않습니다.
한참을 을르던 너구리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려 떠나고
제 몫 지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 하던 차돌이도 긴장한 탓에 입맛을 잃었는지 사료 한 그릇을 다 못 비우고 떠납니다.
잠시 뒤, 그 자리에 힘 없고 약해서 맨날 천덕꾸러기를 벗어나지 못하던 로빈이 은근슬쩍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차돌이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어부지리... ^^
이 날, 캣맘도 사료를 주러 나오십니다.
만난 김에 회색고양이인 줄 아셨던 게 너구리라고 말씀드리고 사진을 보여 드립니다.
놀라서 입을 못 다무십니다.
동물원에서나 볼 줄 알았던 너구리가 우리 동네에 서식한다니...
고양이와 너구리...
공존할 수 있을까요?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길까요?
발톱은 고양이가 날카롭지만 이빨의 크기나 무는 힘은 너구리가 더 셀 것 같은데...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너구리가 있다며 사진을 보여줬지만 아내는 그닥 놀라지 않습니다.
녀석이 바위동산을 산으로 알고 사는 모양이라고,
앞에 개울도 있고 하니 녀석이 살기에는 뭐 그리 나쁜 환경이 아니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그럽니다,
걔들도 잘 먹고 잘 살게 사료나 넉넉히 갖다 주라고...
와~~차돌이 대단해요^^ 덩치큰 너구리에게도 굴하지않는 당당함~~
근데 넘긴장했나봐요^^: 어부지리 로빈^^
차돌이는 너구리와 구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