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 눈을 본 어린 고양이의 눈빛이 호기심에 가득 찼다. 서울 종로1가(2011)
길고양이 달력 시즌이 온다
10월 말, 바람이 싸늘해지면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이맘때는 각계에서 내년 달력 판매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은 11월이나 되어야 내년 달력을 볼 수 있었지만, 점점 그 시기가 빨라져서 10월부터 이미 내년 달력을 선보인 곳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시즌 상품이기에 시장우위를 선점하려고 경쟁적으로 제작 일정을 앞당긴 통에 일어난 현상이다.
안전한 지붕 위에서 한껏 기지개를 켜 보는 노랑둥이. 부산 영선동(2014)
입술의 노란 얼룩 때문에 ‘카레’란 별명을 얻은 노랑둥이도 많다. 서울 혜화동(2015)
똑같아 보이는 노랑둥이라도, 흰 양말의 모양과 비율이 각자 다르다. 서울 통의동(2011)
단순후원을 넘어, 소장하고 싶은 달력의 시대
각 동물단체에서 만드는 달력을 자료 삼아 모으고 있는데, 오래된 달력부터 최근 시판되는 달력까지 비교해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동물단체 후원달력’이라는 의미에만 집중했던 초창기 달력들과 달리, 최근 보이는 달력들은 시판 달력과 비교해도 처지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아졌다. 사용되는 이미지도 동물 사랑을 북돋우는 멋진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채워지는 게 보통이다. ‘후원하는 의미로 사 주는 달력’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소장하고 싶은 후원달력’의 시대가 온 것이다.
2002년부터 찍어 온 길고양이 사진으로 한국고양이보호협회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5년차로 접어든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기자로 일할 때는 업무에 치여서, 퇴사 후에 야옹서가를 시작하면서는 다른 작가들의 책을 만드느라 내 책을 만들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짬나는 대로 찍기만 할 뿐 하드디스크에 그대로 놀고 있는 사진들이 아깝게 느껴질 무렵, 고보협의 제안으로 2016년 달력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고보협에 달력 사진을 보낸 적은 있지만, 여러 재능기부자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어서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이기에, 단 12장만 들어가는 달력이라 해도 내 책을 만들 때만큼 심사숙고해서 사진을 골랐다.
앞발엔 발목양말, 뒷발엔 긴 양말을 멋스럽게 섞어 신은 노랑둥이. 서울 안국동(2005)
양말도 신지 않은 올치즈 색 아깽이가 그늘 아래 잠을 청한다. 서울 종로1가(2008)
고층아파트와 판잣집이 공존하는 동네에서 살아가는 노랑둥이. 부산 범일동(2017)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식을 찾아 아찔한 바위 틈새를 헤맨다. 부산 해운대(2014)
길고양이 후원달력에도 원칙이 있다
어떤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면 좋을까. 매년 같은 고민을 하지만,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 원칙은 단순히 동물단체의 활약상을 홍보하는 달력보다는, 우리네 길고양이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양이에 대한 관심을 독려하는 자료가 되게끔 하자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무실에 놓인 길고양이 달력 하나가 고양이에 관심 없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나라에 고양이보호협회도 있어?”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두 번째는 매년 주제가 있는 달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매년 달력을 모으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소장 가치가 있는 달력이었으면 했다. 처음 사진 재능기부 제안을 받았을 때는 재개발 지역 고양이들을 취재하고 있었던 터라, 2016년 달력 주제도 자연스럽게 재개발 지역 길고양이가 되었다. 2017년 주제는 세계 각국에서 만난 고양이 커플의 사진을 담은 ‘둘이면서 하나인’이었고, 이후로는 고양이 무늬와 색깔별로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열두 달 사진을 채워나가고 있다. 2018년 달력은 삼색 고양이, 2019년 달력은 검은 고양이였고 올해는 ‘진리의 노랑둥이’로 불리는 노란색 고양이들만 모아 ‘노랑둥이는 옳다’는 주제로 열두 달을 꾸렸다.
엄마가 공들여 가르친 건, 낯선 사람을 보면 달아나는 법이었다. 서울 길음동(2015)
친구의 휴식을 방해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도끼눈을 떴다. 부산 장전동(2014)
누구를 기다릴까? 동그란 뒷모습이 귀여워 찍어본 커플 사진. 부산 장전동(2014)
폭설 내린 다음날, 털을 한껏 부풀리고 매서운 한파를 버틴다. 서울 종로1가(2009)
노랑둥이는 옳다
햇살처럼 화사하고 따스하다. 노랑둥이 고양이를 보면 떠오르는 첫인상이다. 토종 고양이 무늬 중에 노랑둥이가 유독 사랑받고, ‘진리의 노랑둥이’나 ‘노랑둥이는 옳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조선 시대 화원 김홍도의 명작 <황묘농접도>에도 장수의 상징으로 통통한 노랑둥이가 등장한다.
완벽한 올치즈 무늬 고양이도 귀엽지만, 앙증맞은 흰 양말을 신었거나 입술에 카레 얼룩을 묻힌 것처럼 흰 바탕에 노란 얼룩이 적당히 섞인 노랑둥이도 사랑스럽다. 길에서 마주친 다양한 노랑둥이의 모습을 모아 보았다. 노랑둥이의 빛나는 털옷처럼, 2020년은 모두에게 햇살처럼 환한 한 해가 되기를 빈다.
글‧사진 고경원
고양이 전문출판 ‘야옹서가’ 대표.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기록하며 국내외 애묘문화를 취재해왔다. 저서로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작업실의 고양이》(2011),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둘이면서 하나인》(2017) 등이 있다. www.instagram.com/catstory_kr
달력 출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