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직후 하록의 모습입니다. 왼쪽 눈 수정체 파열로 실명 상태였죠.
6월 첫째 주 토요일. 주말 출근을 했던 남편이 귀가한다고 연락이 와서 저녁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에 다 올 시간인데 다시 전화가 걸려오더군요.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어요.
"여보. 여기... 아파트 후문에 러블 냥이가 돌아다녀."
"응? 러블?"
"응. 배를 보이고 애옹거린다. 어? 이 녀석, 한쪽 눈이 망가졌네...!"
한쪽 눈이 마치 백내장 걸린 것처럼 동공이 없이 칙칙하기만 하다는 러시안블루 냥이. 남편을 보고 우엉우엉 울면서 쫓아오는 모양이에요. 저보다 더 고양이를 좋아할 뿐더러 고양이 키운 경험도 많은 남편. 속이 상하는지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차마 손내밀진 못했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는 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있고, 혹시라도 집의 냥군에게 전염병이라도 옮길까 싶어 만지지 못했다더군요. 그날 저녁, 남편과 저는 다시 아파트 후문 쪽에 가 보았습니다. 러블 냥이를 한참 찾았지만 보이지 않더군요.
그로부터 며칠 뒤 이른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다른 해와 달리 한 번 쏟아지면 미친듯 퍼붓는 이번 장마를 보며 이 빗속에 외눈박이 러블이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품종묘 길냥이라니, 필시 집 나온 가출묘일텐데 이 빗속에 밥이나 잘 먹을까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약 3주 후, 6월 말. 재활용품 수거일에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려는데 어디선가 '우어엉-'하는 냥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필사적으로 우엉거리는 것이 '엄마, 배고파요!' , '엄마, 저 여깄어요!' 하는 울음소리더군요. 소리 나는 쪽이 어딘가 두리번거리는데 뭔가 제 다리 아래로 스으윽 지나갔어요. 짙은 회색, 촘촘한 터럭, 앙상한 뒷태. "그때 그 녀석이구나!" 직감적으로 남편이 말했던 러블 냥이인 줄 알겠더라고요. 서둘러 집에 뛰어들어가 사료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녀석은 처절하게 우어엉우어엉 울면서 저를 따라왔습니다. 사람들이 덜 드나드는 아파트 한켠 잔디밭에 사료를 주니 허겁지겁 잘도 먹습니다. 먹다가 제가 잠깐 움찔하고 움직이면 이내 서럽게 우어엉우어엉 울면서 찹찹 밥을 먹더군요. 사료를 한 가득 담아 나갔는데 순식간에 다 먹더라고요. 폰의 플래시 빛을 켜서 보니 한쪽 눈이 아예 갈색으로 탁합니다. 눈가엔 고름과 곱도 붙어 있고요. 아... 이 녀석 어쩌지. 하지만 방법 있나요. 밥 다 먹고 나자 녀석은 앞다리 쭈욱 뻗어 기지개 켜고 꼬리도 하늘로 수직으로 탁 세웁니다. 그날은 그냥 그렇게 보고 헤어졌습니다.
그 뒤로 매일 녀석의 밥셔틀이 됐습니다. 이름도 지어 주었어요. 애꾸눈 하록 선장. '하록'이라고요. 밥셔틀 일주일 후, 남편과 저는 녀석을 구조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방치할 것인지 심각하게 얘기했습니다. 녀석이 밥 먹으러 오면 동네 냥이들이 슬금슬금 밥주는 곳으로 모이는 것이, 한 자리에서 밥을 계속 주거나 주기적으로 밥 주는 일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그냥 길냥군들 밥셔틀 하는 식으로 부정기적, 불시에, 이곳저곳에 밥을 주자니 하록은 저희 집(아파트 1층) 아래 오도카니 자리를 잡고 매일 밤 제가 정해진 자리에 밥 날라다 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어 그러기도 힘들었습니다. 제가 길냥이들 밥 주는 식으로 하자면 하록은 며칠 굶다가 다시 또 다른 냥이들과 다툼을 벌여야 했겠지요. 게다가 녀석의 눈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밥셔틀이 문제가 아니라 어여 포획해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어요.
"동네 고양이 다 거둘 순 없잖아. 아픈 애가 쟤만도 아니고..."
"밥셔틀만 하자. 그냥 냥군들 먹이는 식으로 여기저기에."
밥을 안 주겠다고 결론 내리고 남편과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하록이 매일 밥을 기다리는 시간. 마침 외출할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빈손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록은 저희의 발소리를 듣고 와우우엉 우오오오옹 울면서 잔디밭에서 뛰어나왔습니다. "이제 너 밥 없어. 여기서 밥 안 줄거야." 와아우어어오옹, 밥을 주세요오어어엉. "아니야. 이제 밥 안 줘. 여기저기 멀지 않은 데 놓을테니까 가서 찾아서 먹어. 여기 자리 잡고 울면 다른 냥이들도 오고 동네 사람들이 싫어해." 하록은 속도 모르고 꼬리를 바짝 세우고 아오오어어엉 웁니다. 남편과 저는 하록을 모른체 하고 단지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록이 쫓아옵니다. 필사적으로 총총총 뛰어서 저희 뒤를 따라옵니다. 저희가 큰길로 나와 길을 건너자 그제서야 길 너머에 하록이의 발이 묶였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곳까진 따라올 수 없었던 거죠. 고양이는 큰 소리로 아우어어엉 울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살겠다고 큰길까지 쫓아나오는 냥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치료하자. 포획해서 병원 데려가자. 하는 데까지 해보자." 남편과 저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하지만 길냥군을 포획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박스로, 담요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덮어씌워보고 저리 몰아봤지만 잡히지 않더군요. 그후로도 한참 하록에게 밥셔틀만 하며 상황을 보았습니다. 눈은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는데, 어떡하나. 협회에 연락해 통덫을 빌리고 장기전을 준비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단기전으로 후딱 잡힐 냥이가 아니라고 각오를 다졌지요.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뜻밖에도 '그 순간'이 왔습니다. 도적처럼, 갑자기.
(2편에 계속)
2탄부터 읽었습니다. 녀석이 두 내외의 애간장을 태웠군요 짜슥~~~ 사실 하록선장도 그렇게 녹녹한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 ㅋㅋㅋ